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바라보며 3

둘째, 관계에 대해서

딘 셔먼(Dean Sherman)이라는 와이엠 강사가 있습니다. 영적 전쟁이라는 책을 써서 영적 전쟁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교계에 소개한 분입니다. 10년전에도 그 분의 강의를 들었었는데 이번에 그 분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간에 강의가 더 깊어지고 풍성해져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70대 중반의 노신사입니다. 제가 그 분을 처음 만났을 때가 60대 중반이었지요. 10년만에 더 깊어진 그 분의 모습은 제게 귀한 도전이 되었습니다. ‘나도 십년 뒤에는 또 저렇게 성장한 모습으로 가고 있겠구나’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지요.

그 분이 이번 강의에서 하신 말씀 중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영적 전쟁은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죄의 속성은 관계를 깨는 것입니다. 사탄의 핵심 목표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깨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죄를 짓게 했지요.

죄는 바이러스 이상으로 전염성이 강하고 관계를 파괴합니다.
저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보면서 그것이 죄와 참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죄처럼 전염성이 빠릅니다. 그리고 기존 바이러스와 다르게 무증상 환자를 통해서도 전염시킬 정도로 위장술이 뛰어납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교묘하게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탄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사탄은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죄는 결국 자연계를 훼손하고 야생동물과 사람의 간격이 가까워지게 합니다. 많은 먹을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보신 목적으로 야생동물을 잡아서 그것을 날 것으로 먹는 과정에서 동물의 몸속에서만 기생할 수 있었던 코로나 바이러스에게 사람에게 침투하여 사람에게 기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사탄은 그 상황을 이용해서 사람을 더욱 망가뜨리는 방향으로 일하려 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성도를 파멸시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탄은 사람의 마음을 충동시켜서 관계를 파괴하게 합니다. 즉 사탄의 영적 전쟁의 핵심목표는 관계를 타고 들어와서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깨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관계를 깨면 모든 것을 깨뜨리는 것이 됩니다. 관계가 깨어지면 영원한 생명도 깨어집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근거이자 이유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다름 아닌 관계 회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사탄은 이 바이러스를 통해서 우리의 관계를 깨뜨리는데 모는 에너지를 집중할 것입니다.

사탄은 이 기간 사람들이 서로를 원망하고 비난하게 하게 할 것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을 부추길 것이고 이 상황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 노력하게 할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이 기간 관계를 회복하는데 성공한다면 사탄의 간교한 계획은 물거품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승리하게 됩니다.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자칫 하면 남들에게 적당히 잘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용남과 포용을 경험하면서 그 사랑에 감격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열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분과 관계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 분의 사랑의 방식이 나의 방식을 압도하기를 소망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지요. 그렇게 자기중심성이 죽어지고 그 분의 사랑이 우리에게서 넘쳐흐를 때 우리는 조금씩 누군가와 좋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자가격리와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간 동안에 우리의 무너진 부분을 세우고 돌아보게 하시며 우리가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그 분의 초청에 반응하게 된다면 이 시간은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관계로 자라가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됩니다.

사회적 격리 기간은 다시 말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과 가장 밀접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싫든 좋든 가족과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가게 됩니다. 이 때 가족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다시 세우는 특별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시기에는 우리의 관계 가운데 취약했던 부분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숨기고 싶었던 관계의 한 부분이 드러나고 그것이 바로 내 자신의 내면의 이기심과 엮여서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음을 보고 겸허해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땅끝은 자녀들이라는 말을 했는데 수긍이 가는 표현입니다. 안타깝게도 선교사들의 자녀들 중 다수가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밖에서의 삶과 집에서의 삶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역에 쏟는 에너지가 너무 커서 자녀들에게 동일한 에너지를 쏟을 수 없었던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에게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 몇 해 동안 잦은 출장으로 집을 비워야 했습니다. 바쁜 스케줄을 유지하다 보니 피곤함 가운데 집에서는 제 원하는 세팅을 만들기 위해서 자녀들에게 큰 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느 새 아이들에게는 제가 가정에서 불필요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녀들의 모습이 제게 상함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번 안식년 기간 그것을 만회해 보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내의 요청에 응하기 시작하고 또 인도네시아 사역을 위해서 몇 차례 방문 계획을 잡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상황 가운데 그 모든 것을 끊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물어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모든 계획들이 꼭 필요한 것이었니?”

두 주 전에 뉴저지와 뉴욕에 집회 가게 되면서 아이들 세 명을 데리고 다녀와야 했습니다. 아내가 DTS 과정 수업을 들어야 해서 제가 아이들을 맡아야 했기에 집회에 아이들을 데려가야 했습니다. 실은 걱정이 앞섰습니다.
틴 에이저인 둘째와 초등학생 셋째 넷째의 필요가 서로 다른 데다가 셋째가 새로운 환경에서 공부하면서 불안증이 생기고 틱 현상을 겪게 되었지요. 예민하고 자주 폭발하는데 아이를 달래는 것이 역부족이었습니다.
더구나 제가 몇 차례 야단친 것으로 인해 아이가 저의 훈계를 기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어려운 결정이었는데 하나님이 주신 부담은 아이들을 챙기는 것이 우선순위라는 것이었습니다.

집회 차 가서 집회 준비하는 중에 아이들을 섬겨주고 또 아이들의 다른 필요에 반응해 주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두세 차례 아이들의 자기중심적인 태도에 뚜껑이 열리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이 바로 네 모습이란다. 그런데 그런 너를 내가 품었고 사랑했단다.”

저는 제 아이조차 품어낼 수 없는 사역자임을 자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제 아이조차도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저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수용하고 받아내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항상 제가 중심에 있으면서 아이들에게 잘 따라오라고 요구했던 것이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아이들이 제 훈련교관이란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들을 품어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아이들은 그런 저의 모습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수용이 저를 바꾼 것처럼 아이들은 저의 무조건적인 수용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 사랑 가운데 안전함을 느낄 때 아이들은 비로소 제 말을 듣고 태도를 바꾸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면서 아내와 저는 새로운 도전 가운데 직면했습니다. 일 분담의 영역에서 서로 간의 긴장이 생기더군요. 아이들을 직접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순간이란 사실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이 시간은 피하고 싶은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특별한 시기에 우리 자녀들을 우리 손에 맡겨 주셨습니다. 이런 시간은 우리 인생 가운데 두 번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특별한 시간입니다. 아이들의 삶에서 부모와 함께 했던 순간으로 각인되는 특별한 기회이지요.

이 시기는 아이들의 신앙과 삶의 태도와 가치관에 대해서 점검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또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한없이 낮아지는 시간이기도 할 겁니다. 이 시간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받고 함께 누리는 시간을 가지기를 기대하고 축복합니다.